문학 18

가을의 기도 Prayer of Autumn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문학 예술」(1956.11)

문학 2019.08.22

그 사람을 가졌는가?

고 장영희 교수님 에세이(생전에 조선일보 칼럼에 기고하신 글입니다) [고전의 바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선생님, ‘인생성공 단십백’이 뭔지 아세요?” 학생이 물었다. 모른다고 답하자 학생이 말한다. “한 평생 살다가 죽을 때 한 명의 진정한 스승과, 열 명의 진정한 친구, 그리고 백 권의 좋은 책을 기억할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이래요.” 나는 재빨리 내 삶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따져 보았다. 한 명뿐 아니라 운 좋게도 나는 초등학교때부터 대학까지 훌륭한 스승들을 여럿 만났고, 책읽는 게 업이니 내가 좋아하는 책을 백 권 아니라 이백 권도 더 댈 수 있다. 그런데 암만 생각해도 ‘열 명의 진정한 친구’는 좀 무리이다. ‘진정한 친구’는 어떤 사람일까. 함석헌 옹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에서 말한다. ..

문학 2019.04.20

오늘의 시 --- 시인 박목월

사월의 노래 / 박목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크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을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문학 2019.04.19

젊은날의 습작 시

무 덤 가을 햇살이 따사롭던 고즈넉한 동해안가에 이름없는 무덤 하나 있었지 어떠한 사치도 치장도 흔해빠진 비석도 하나 없이 흙과 잔디만으로 덤덤히 저녁 노을은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고 산새들 둥지를 찾는 시간이었어 계절에 취해 헤매던 나는 그의 조그만 안식처를 발견하고는 그만 발걸음을 멈추었었지 어떤 보이지않는 사슬에 묶인듯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나는 옮길 수 없었어 초가을의 무심한 바람은 무덤의 마른 풀잎을 쓰다듬고 그의 집이 자꾸 초라하게 느껴졌지 완전하고 영원한 고독 철저한 소진으로 남겨진 자취 인생의 무게만큼 허무가 몸서리첬어

문학 2019.04.18

오늘의 시 - 시인 윤동주

별헤는 밤 /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즈 잠, 라이너 마리아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

문학 2019.03.05

오늘의 시 - 시인 정호승

산산조각 / 정호승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루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문학 2019.03.04